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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역사 완벽 가이드: 조선통신사부터 덕혜옹주의 비극까지 훑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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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역사 완벽 가이드: 조선통신사부터 덕혜옹주의 비극까지 훑어보기

대마도 역사의 서막: 지리적 요충지로서의 운명과 지명 유래

1. 역사 기록 속에 나타난 첫 모습

대마도는 3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대마도는 왜(일본)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대마도는 고대부터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2. 이름에 담긴 유래와 설화

대마도(對馬島)라는 한자 명칭은 ‘두 마리의 말이 마주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섬의 지형상 상도와 하도가 서로 마주 보는 형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한편에서는 당시 삼한 중 하나인 마한(馬韓)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학술적 근거가 부족한 민간 설화에 가깝다.

3. 한반도와 밀접한 지정학적 위치

지리적으로 대마도와 부산 사이의 거리는 약 50km 내외이다. 이는 한국의 본토에서 제주도까지의 거리보다도 가까운 수준이다. 일본 본토인 큐슈보다 한반도와 더 인접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양측의 정세를 살피며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대마도 조선 통신사
© NPTA - 조선 통신사 행렬 재현 모습

고대 시기

1. 백제 멸망과 가네다성의 축조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일본 지원군이 패배하자 일본은 한반도 세력의 침공을 크게 우려하였다. 이에 따라 667년 대마도에 가네다성(金田城)을 쌓았다. 현재는 성터만 남아 있으나, 당시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핵심적인 방어 시설이었다.

가네다 성터 위치

2. 신라 말기의 해상 혼란과 피해

9세기에 접어들어 통일신라가 약해지고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자 바다에서는 해적 활동이 크게 늘어났다. 당시 일본 기록은 이들을 ‘신라구(新羅寇)’라고 부르고 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운 대마도는 이러한 해적 활동으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지역 중 하나였다.

고려시대

1. 진봉 무역의 구조와 성격

고려시대 대마도는 ‘진봉 무역’ 형태의 조공 무역 체제를 형성하였다. 이는 대마도가 고려에 토산물을 바치면, 고려가 그보다 귀한 하사품을 내리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과거 조선이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 하사품을 받았던 외교적 관례와 매우 유사한 성격을 띤다.

2. 조공 관계의 역사적 해석

이러한 조공 관계만을 근거로 당시 대마도가 고려의 완전한 영토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대마도 입장에서는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작은 것을 바치고 큰 것을 받는’ 실리적인 무역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타당하다. 즉, 대마도는 생존과 경제적 실리를 위해 고도의 외교 전략을 펼친 것이다.

원간섭기 시대

1. 여몽연합군의 대마도 상륙과 1차 원정

1274년 10월, 여몽연합군은 사스우라(현 고모다하마)에 상륙하였으며, 이를 대마도 전투라 한다. 연합군은 이키섬을 점령하고 하카타만까지 진출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하순 태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고모다하마 위치

2. 2차 원정과 ‘카미카제’의 유래

1281년 홍다구가 이끄는 2차 원정군이 다시 일본을 침공하였으나, 이때도 역시 강력한 태풍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일본에서는 이 두 차례의 태풍을 두고 신이 나라를 구했다는 의미에서 ‘카미카제(神風)’라 불렀다.

3. 카미카제의 재해석과 특별공격대

이 개념은 훗날 태평양전쟁 시기, “인간이 스스로 신의 바람이 되어 적을 격파한다”는 의미로 재해석되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신풍 특별공격대(神風特別攻撃隊)라는 자살 특공 조직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신풍 특별공격대(神風特別攻撃隊)의 ‘神風’은 단독으로 읽을 경우 ‘카미카제’로 읽지만, 공식적인 훈독으로는 ‘신푸(しんぷう)’라고 읽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현재 전 세계적으로는 ‘카미카제’라는 통칭을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왜구의 탄생

1. 척박한 농경 환경과 경제적 취약성

대마도는 현재도 ‘물반 고기반’이라 불릴 만큼 수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대마도의 농지는 전체 면적의 약 4%에 불과하여 곡물을 스스로 조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구조였다. 이 때문에 과거 주민들은 잡은 수산물을 팔아 쌀을 구해야 하는 취약한 경제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2. 지리적 소외와 교역의 어려움

대마도는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에 더 가까운 섬이다. 당시 대마도와 일본 본토 사이에는 이키섬이 위치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와의 교역에서는 이키섬이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중간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마도의 수산물을 일본 본토에 직접 판매하기에는 거리와 여건상 불리하였고, 실질적인 상권의 중심 역할은 이키섬이 차지하고 있었다.

3. 생존을 위한 선택과 왜구의 등장

이러한 환경에서 대마도 주민들에게 식량 확보는 생존과 직결된 가장 큰 문제였다. 이후 고려와의 교역이 원활하지 않게 되고 무역 재개 요청마저 거절당하자, 생계가 막막해진 일부 세력이 왜구 활동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대마도는 왜구의 주요 본거지가 되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한반도 연안을 넘어 명나라와 일본 본토까지 확대되었다.

고려 말 왜구 정벌

1. 고려의 무력 대응과 1차 원정의 시작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고려는 결국 무력 대응을 결정하였다. 고려 말기 대마도를 대상으로 한 가장 이른 시기의 원정은 1389년(창왕 원년)에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제1차 대마도 정벌로 기록되어 있다.

2. 박위 장군의 활약과 성과

당시 고려의 장수 박위(朴葳)는 군대를 이끌고 대마도로 진격하여 왜구를 급습하였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왜선 수백 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으며, 붙잡혀 있던 많은 포로를 구출하였다. 이는 왜구의 본거지이자 해상 세력의 중심지를 직접 타격한 상징적인 작전이었다.

3. 기록의 한계와 역사적 보완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고려사(高麗史)』 등의 정사에는 전투의 구체적인 과정이나 규모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사건은 조선 시대의 기록과 후대 자료를 통해 그 내용이 보완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조선 태조 때

1. 끊이지 않는 왜구의 침입과 정벌 결단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은 멈추지 않았다. 태조 2년부터 6년까지 약 4년 동안 무려 50여 차례에 달하는 침입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태조 5년(1396년), 왜선 120척이 동래와 기장 일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태조 이성계는 대대적인 정벌을 결단하기에 이른다.

2. 김사형의 원정과 군사적 성과

조선 조정은 김사형(金士衡)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원정을 단행하였다. 비록 대마도 상륙과 구체적인 전투 과정에 대해서는 학계의 이견이 있으나, 원정 후 태조가 직접 군대를 맞이하고 치하하는 잔치를 베풀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군사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는다.

3. 회유 정책과 왜구의 귀화

조선은 무력 대응뿐만 아니라 회유 정책도 함께 펼쳤다. 당시 왜구의 우두머리였던 나가온(羅可溫)은 병선 24척을 이끌고 투항하였으며, 조선에 귀화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태조는 그에게 선략장군(宣略將軍) 직위를 내리고 임온(林溫)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조선의 백성으로 받아들였다.

조선 세종 때

1. 이종무의 기해동정과 전술적 시련

1419년 5월, 왜구가 충청도 비인현(현재의 충남 서천군 비인면 일대)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주자 상왕 태종은 대대적인 토벌을 지시하였다. 이종무 장군이 이끄는 1만 7천여 명의 병력은 대마도로 진격하여 초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왜구가 산속으로 숨어 유격전을 펼치자, 조선군은 선봉을 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아 진격을 결정하는 전술적 선택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매복해 있던 왜구의 기습을 받아 18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2. 태종의 강력한 통첩과 대마도의 항복

정벌 직후 상왕 태종은 대마도가 본래 조선의 땅임을 강조하며 강력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1420년 대마도 영주 소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조선의 지방 행정 체제에 편입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며 항복하였다.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된 곳"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3. 인장 위조와 대마도의 이중적 생존 전략

세종은 대마도 영주에게 공식 인장을 하사하여 무역의 질서를 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마도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 인장을 위조하거나 가짜 국서를 만드는 등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은 왜구 활동의 재개를 우려하여 이를 어느 정도 묵인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성종 2년(1471년)에 이르러 위조가 어려운 새로운 인장을 제작하여 외교 질서를 다시 세웠다.

쓰시마 조선통신사 역사관 에서는 당시의 위조 도장 체험을 할 수 있다. 실물 도장은 큐슈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당시 대마도의 절박했던 외교 형태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실물 미리보기

삼포 개항과 삼포왜란

1. 삼포 개항과 초기 운영의 변화

조선은 왜구의 발생을 억제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1426년(세종 8년)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세 항구를 개항하였다. 이를 삼포 개항이라 하며, 왜인들이 지정된 장소에 머물며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초기에는 세금 면제 등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며 거주 인원을 제한하였으나, 유리한 환경 덕분에 실제 거주 인원은 약 2,000명에 이를 정도로 급증하였다.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밀수와 폭력, 약탈 사례가 빈번해지자 조선 정부는 점차 혜택을 줄이고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2. 삼포왜란의 발발과 '소야차' 소기파

조선의 통제 강화와 관리들의 가혹 행위는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특히 부산포 첨사 이우증의 가혹한 처우 등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며 1510년(중종 5년),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삼포왜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조선 민가 800여 채가 불타고 272명이 목숨을 잃는 등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조선 조정은 즉각 반격에 나섰으며, 웅천 현감 소기파(蘇起坡)가 진압의 선봉에 섰다. 그는 여진족 토벌로 단련된 무관으로, 왜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매우 강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적의 기세를 꺾기 위해 극도로 과격한 방식을 사용했던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불교 설화 속 귀신인 ‘야차’에 빗대어 그를 ‘소야차’라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3. 임신약조를 통한 통제 정책으로의 선회

삼포왜란 진압 이후 조선은 기존의 유화 정책을 폐기하고 강력한 통교 축소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1512년 체결된 임신약조를 통해 왜인의 삼포 거주를 엄격히 금지하였으며, 세 항구 중 제포 한 곳만을 제한적으로 개항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결국 삼포 개항은 왜구를 달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나, 내부 갈등과 폭동을 거치며 조선의 대일 정책이 엄격한 통제와 감시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의 서막, 대마도의 외교와 왜곡된 서신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과 대마도의 국서 변조

16세기 후반,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향해 강경한 침략 의사를 드러냈다. 그는 대마도 영주에게 조선을 복종시키고 명나라 정벌의 길잡이 역할을 하라는 ‘정명향도(征明向導)’의 뜻을 담은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과의 교역 중단이 생존과 직결된 대마도 영주는 이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대신 문구를 대폭 완화하여, 조선에는 “일본 통일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내 우호를 다지자”는 내용과 함께 ‘가도입명(假道入明)’이라는 형식으로 내용을 변형하여 전달하였다.

정명가도(征明假道)는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표현은 당시 외교 문서에 적힌 정확한 문구라기보다, 후대 역사학계에서 상황을 요약하기 위해 정리한 용어에 가깝다. 즉, ‘정명(征明)’ ‘가도(假道)’라는 두 단어를 합쳐 긴박했던 외교적 요구를 압축적으로 나타낸 역사적 용어라고 할 수 있다.

2. 조선의 대응과 임진왜란의 발발

조선의 선조는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조선 사절단이 자신에게 항복하러 온 것으로 오해하였고, 복속 의사가 보이지 않자 결국 무력 침공을 결심하게 된다. 1592년, 히데요시는 대마도를 거점으로 삼아 부산으로 침공하였다. 이것이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3. 팔도총도(八道總圖)에 나타난 대마도 인식

당시 히데요시가 제작하게 한 ‘팔도총도(八道總圖)’ 기록을 보면 대마도가 한반도 영역에 포함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일본 권력층 내부에서도 대마도를 조선과 매우 밀접하거나 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공간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팔도총도 지도 보기

당시 일본에서 제작된 팔도총도를 보면 우산도(독도)작릉도(울릉도)의 위치가 바뀌어 있는 등 기술적 오류가 발견된다. 하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사실은 대마도를 포함한 이 섬들이 모두 한반도의 영역 안에 명확히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만 대마도는 농사짓기에 매우 척박한 땅이었기에,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직접 다스리는 실익보다 행정적 비용과 관리 부담이 더 컸다. 결국 대마도는 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도 직접 통치보다는 특수한 접경 지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조선통신사 역사와 대마도: 평화 외교의 창구이자 문화 교류의 가교

1. 전쟁 이후, 외교 창구가 된 대마도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과 일본은 단절된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곳은 바로 대마도였다.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요충지였으며, 일본 본토와 조선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본의 새로운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국교 회복을 원했고, 그 실무를 대마도 소씨 가문에 맡김으로써 대마도는 양국 사이의 중개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2. 조선통신사와 통교 재개

1607년, 조선은 일본에 첫 회답 겸 쇄환사를 파견하였으며, 이것이 이후 19세기 초까지 12차례 이어진 조선통신사의 시작이다. 통신사는 일본 막부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상징적인 사절단이었다. 대마도는 이 과정에서 사절단의 왕래를 주선하고 숙소와 항로를 관리하며, 문서를 중개하는 핵심 창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로써 대마도는 전쟁의 발판이 되었던 섬에서 평화 외교의 통로로 변모하였다.

3. 무역으로 생존한 대마도

전쟁 이후 대마도의 경제는 조선과의 무역에 더욱 강력하게 의존하게 되었다. 조선은 부산에 초량왜관을 설치하여 제한적인 무역을 허용하였다. 대마도 상인들은 이를 통해 쌀·면포·인삼 등을 들여오고 일본의 물품을 조선에 판매하였다. 자체 생산 기반이 약했던 대마도에게 조선과의 교역은 곧 생존 문제였기에, 대마도는 조선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초량왜관은 1678년부터 1876년까지 부산 용두산 일대 약 10만 평에 달하는 대규모 부지에 설치된 조선 시대 최대의 일본인 거류지이다. 이곳은 오랫동안 대마도와 조선을 잇는 외교와 무역의 핵심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초량왜관은 일본인들이 자유롭게 거주하며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전관거류지(조계)로 성격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현재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倭館) 이라는 지명은 15세기 초부터 조성되었던 역사적 장소에서 유래한다. 이곳은 당시 일본 사절단이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이동 중 머무르거나 쉴 수 있도록 마련된 내륙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폐쇄되었으나, '왜관'이라는 지역 명칭만큼은 수백 년의 세월을 지나 오늘날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4. 막부와 조선 사이, 줄타기 외교

에도시대 내내 대마도 소씨 가문은 일본 막부의 신하이면서도, 동시에 조선과는 특수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이중적 지위에 있었다. 일본 내에서는 하나의 번(藩) 영주였으나, 조선의 기록에서는 경상도에 예속된 존재로 다루어졌다. 이처럼 대마도는 양국 체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근대 이후

1. 메이지 유신과 체제의 변화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대마도의 중개자적 지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대마도는 더 이상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독자적인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는 환경에 놓였다.

2. 폐번치현과 나가사키현 편입

일본은 기존의 번(藩) 체제를 폐지하고 현대적인 행정 구역인 현(県) 체제로 개편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마도는 나가사키현(長崎県)에 최종적으로 소속되었다. 이는 대마도가 일본의 중앙 정부 통제 아래 있는 공식적인 지방 영토로 확정되었음을 의미한다.

3. 지위의 변화와 현대적 통합

이로써 대마도는 조선과 맺어왔던 특수한 외교적·행정적 위치를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게 되었다. 대마도는 과거의 이중적인 지위에서 벗어나 일본의 지방 행정 구역 중 하나로 완전히 통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대마도 사투리 속의 한국어 흔적

1. 한국어와 유사한 대마도 사투리 사례

대마도 사람들이 사용하는 고유 사투리 중에는 한국어와 발음 및 의미가 매우 흡사한 단어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는 단순한 우연을 넘어 양측의 깊은 교류 역사를 증명하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 친구: 대마도에서는 친구를 칭구(ちんぐ)라고 부른다. 이는 한국어의 '친구'와 발음이 매우 유사하다.
  • 바지: 바지를 한국어와 발음이 흡사한 바치(ばち)를 사용한다.
  • 빨리빨리: 한국인의 특징적인 표현인 '빨리빨리'와 유사한 파리파리(ぱりぱり)라는 표현이 사투리로 남아 있다.
  • 지게: 한국의 전통 운송 도구인 지게를 대마도에서도 동일한 단어와 용도로 사용한다.

2. 역사적 배경 및 현지 반응

이러한 언어적 유사성은 과거 한반도와 대마도 간의 활발했던 인적·물적 교류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마도 현지인들은 이 단어들을 조상 대대로 내려온 고유의 언어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이것이 한국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매우 놀라운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두 지역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밀접한 관계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적 지표이다.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 대마도에 남겨진 비극적인 삶의 흔적

1. 고종이 61세에 얻은 귀한 막내딸

1912년, 국권 피탈 후 실의에 빠져 있던 61세의 고종 황제에게서 덕혜옹주가 태어났다. 고종은 늦게 얻은 외딸을 위해 파격적인 사랑을 쏟았다. 옹주를 위해 자신의 침전인 합령전을 공유하고, 준명당에 유치원을 만들어 귀족 자제들과 어울리게 하였다. 특히 일제가 신분을 이유로 입적을 거부하자, 고종은 총독을 유치원으로 직접 불러 옹주를 보여주는 사투 끝에 6살 때 정식 옹주로 입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2. 빼앗긴 나라와 끊어진 보호막

고종은 딸이 일본에 인질로 잡혀갈 것을 우려해 6살 때부터 은밀히 약혼을 추진했으나 일제의 감시로 무산되었다. 1919년 고종이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8살의 옹주는 독살설로 인한 깊은 트라우마를 안게 되었다. 일제는 옹주가 조선 민중의 상징이 되는 것을 경계하여, 1925년 14살의 옹주를 강제 도쿄 유학길에 오르게 하였다.

3. 도쿄의 보온병과 상복 없는 장례식

일본 황족 학교인 여자학습원에서 옹주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독살 공포로 인해 늘 자신의 보온병에 든 물만 마셨으며, 1929년 어머니 양귀인이 별세했을 때조차 일제는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옹주에게 상복 착용을 금지하였다. 18세의 소녀는 임종도 지키지 못한 채 다시 일본으로 끌려갔고, 이때부터 조현병(당시 조발성 치매)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4. 대마도 백작과의 강제 결혼

일제는 병세가 깊은 옹주를 1931년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시켰다. 당시 조선일보는 분노한 민심을 반영하여 결혼식 사진에서 남편의 얼굴을 삭제하고 보도하였다. 옹주는 딸 마사에(정혜)를 낳으며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으나, 대마도 방문 중 터진 웃음 발작으로 병세가 악화되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남편이 지위를 잃고 가난해지자 옹주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 위치

5. 38년 만의 귀국과 엇갈린 비극

1950년, 기자 김을한(약혼자의 친형)에 의해 정신병원에 방치된 옹주의 비참한 실태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정치적 계산으로 귀국은 미뤄졌고, 그사이 딸 마사에는 자살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는 비극이 닥쳤다. 결국 1962년 1월 26일, 옹주는 38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다. 공항에는 옹주를 키운 유모 변복동 여사가 백발이 된 채 마중을 나와 있었다.

6. 유모 변복동의 일편단심과 낙선재의 마지막

변복동 여사는 옹주가 일본으로 떠날 때 눈물로 배웅했던 충복이었다. 그녀는 옹주가 타국에서 고초를 겪는 동안 홀로 옹주를 기다려왔다. 공항에서 정신이 혼미한 옹주를 마주한 변 여사는 “애기씨, 저 복동이예요”라며 오열하였고, 이후 옹주가 창덕궁 낙선재에 머무는 동안 정성을 다해 수발을 들었다. 덕혜옹주는 대한민국을 그리워하며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고요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