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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역사
여행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역사이다.
역사가 존재하기에 문화유산이 생기고, 그 문화유산이 곧 관광지로 이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런 역사적 맥락이 없는 장소라면, 단지 의미 없는 공간에 불과하다.
'홋카이도'라는 이름이 생긴 지는 아직 2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이 땅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떻게 개발되어 왔는지를 알고 방문한다면 보이지 않던 것들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단 10분의 시간을 들여 홋카이도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여행의 깊이와 재미는 10배 이상으로 확장될 것이다.
아이누족의 탄생
기원전 1만 년경,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바다가 형성되면서 일본은 섬나라가 되었다. 이 시기에 정착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시대를 조몬 시대라 부른다.
이는 한국의 신석기 시대와 유사하며, 조몬 시대 역시 토기를 사용하는 문화가 특징이다. 섬이라는 지리적 고립성으로 인해 일본은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고, 이를 조몬 문화라 한다.
해수면이 오르기 전에는 일본과 대륙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한반도나 현재의 러시아 지역에서 유입된 다양한 부족들이 존재했다. 특히 북쪽에서 유입된 일부 부족은 일본의 동북지방과 현재의 홋카이도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몸에 털이 많고, 남성은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기르고, 여성은 입 주변에 검은 문신을 새기는 독특한 문화를 가졌다. 이로 인해 초기에는 '털이 많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毛人(모인)'이라 불리며, '에미시(えみし)'라고 읽었다.
이후에는 '새우 하(蝦)'와 '오랑캐 이(夷)'를 합쳐 '에조(蝦夷, えぞ)'라 불렀고, 그들이 사는 땅은 '에조치(蝦夷地)'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교역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에조'라 부르는 것을 불쾌하게 여긴 이들은, 자신들을 '인간'을 뜻하는 말인 '아이누(Ainu)'로 불러주기를 원했고, 이후부터 이들을 '아이누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4세기 초 삼국시대 무렵, 일본은 한반도와 교류하며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통일 국가인 야마토(大和) 정권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홋카이도, 도호쿠 지방, 쿠릴 열도, 사할린 등지에 살던 아이누족은 부족 중심의 공동체 생활을 이어갔으며, 국가 체제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야마토 정권은 이후 다이카 개신,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를 거치며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국호도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변경하며 근대 국가로 나아갔다. 그러나 아이누족은 여전히 부족 사회의 형태를 유지하며 국가 체제와는 거리를 두었다.
당시 일본 본토의 사람들은 이러한 부족 생활을 이어가는 아이누족을 ‘오랑캐’로 인식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대응을 하였다.
일본의 쇼군과 아이누족과의 관계
헤이안 시대 말기, 관동 지방의 무사였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세력을 정리하고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다. 그는 1192년에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이라는 관직에 취임하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쇼군(将軍)' 체제가 시작되었다.
'정이대장군'이라는 명칭을 보면, '칠 정(征)'과 '오랑캐 이(夷)' 자가 사용되는데, 이는 '오랑캐를 정벌하는 장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오랑캐'로 지칭된 대상은 바로 북쪽에 거주하던 아이누족이었으며, 이들을 견제하고 정복하기 위한 명분으로 정이대장군이라는 직책이 만들어졌고, 요리토모가 그 첫 정식 임명자였다.
이전까지 정이대장군은 특정 시기에 임시로 부여되던 직책이었지만, 요리토모 이후에는 실질적인 통치 권력을 가진 최고 권력자의 자리로 고정되었다. 덴노(천황)는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게 되었으며, 이러한 권력 구조는 약 700년 동안 이어졌다.
이후에도 정이대장군 외에 규슈 남부의 이민족을 견제하기 위한 정서대장군(征西大将軍) 등 다양한 장군 직책이 존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정이대장군만이 남아 쇼군으로서의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코샤마인 전쟁
아이누 족은 철을 직접 생산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제철 기술을 보유한 일본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생필품을 얻었다.
그러던 중, 에조치 남부, 현재의 하코다테 지역에서 한 아이누 소년이 일본인 대장장이에게 작은 칼을 주문했으나, 품질은 형편없고 가격은 지나치게 비쌌다는 이유로 갈등이 발생하였다.
말다툼 끝에 일본인 대장장이가 아이누 소년을 칼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이누 족은 분노하여 조직적으로 연합해 일본인들과 무력 충돌을 벌였으며, 당시 아이누 족 지도자의 이름을 따 이 전쟁을 '코샤마인 전쟁(1457)'이라 부른다.
전쟁 초반에는 아이누 족이 일본인 거점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다케다 노부히로가 코샤마인 부자를 살해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다케다 노부히로는 이 공로로 자신의 가문 이름을 '가키자키(蠣崎)'로 개명하고, 일본 본토와 에조치(홋카이도)를 잇는 창구 역할을 맡게 되었다.
마쓰마에 성
센고쿠 시대, 즉 전국시대(戦国時代)가 개막한 계기가 된 오닌의 난(1464년) 이후, 약 100년에 걸쳐 일본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일본인들이 에조치로 이주하게 되었고, 아이누 족은 점차 자신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가문의 이름을 가키자키로 바꾼 뒤, 5대 당주 요시히로는 일본인과 아이누 족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다가,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종하며 가문명을 다시 마쓰마에(松前)로 개명하였다.
이후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요시히로는 차기 권력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에조치 지도를 바치며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가 승리하고, 1603년에는 에도 막부가 성립되었으며, 이듬해인 1604년 마쓰마에 요시히로는 아이누 교역의 독점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홋카이도 최초의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의미했다.
일반적으로 다이묘가 되기 위해서는 연간 1만 석(石) 이상의 쌀 수확이 필요하다. 이때 1석은 성인 남성 1명이 1년간 소비하는 쌀의 양으로, 이에 해당하는 농지에서 수확되어야 한다.
- 당시 에조치는 기후와 환경상 쌀 재배가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누와의 교역을 통해 충분한 수익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요시히로는 다이묘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교역 수익은 곧 권력의 기반이었다.

이후 일본인과 아이누 족의 거주지를 철저히 구분하고, 교역은 마쓰마에 성 아래에서만 허용되었다. 이는 철저한 통제 정책의 일환이었다.
교역 품목으로는 일본인이 철제품, 쌀, 자기를 제공하고, 아이누 족은 수산물, 해초류, 동물 가죽 등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물품의 가격은 항상 마쓰마에 번에게 유리하게 책정되었고, 이로 인해 아이누 족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샤쿠샤인의 반란
에조치에서 아이누 족의 삶이 점점 어려워지자, 내부에서도 세력 다툼이 발생하게 된다.
아이누 족은 여전히 부족 단위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히다카 지방의 부수장 샤쿠샤인과 하에 지역의 수장 오니비시가 어업권과 수렵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던 중, 1648년 샤쿠샤인이 오니비시의 부하를 살해하면서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1653년, 하에의 아이누 족은 히다카 부족의 수장인 가모쿠타인을 살해하였고, 이로 인해 샤쿠샤인이 히다카 부족의 족장이 되었다.
마쓰마에 성에서는 갈등을 중재하고자 양측을 초청하였으나, 샤쿠샤인은 자신들의 족장을 살해한 오니비시를 현장에서 또다시 살해하고 만다.
이에 오니비시의 매형인 우타후는 마쓰마에 번청에 찾아가 무기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망하게 된다.
사인은 천연두로 전해지지만, 일본 측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아이누 사회 내에 불신과 소요가 발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샤쿠샤인은 아이누 족 전체를 대표해 부족 간 분열을 멈추고 단결할 것을 호소한다. 💬
결국 1669년, 샤쿠샤인은 약 2,000명의 병력을 규합하고 일본인 273명을 살해하면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마쓰마에 번은 에도 막부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여 병력을 보강한다.
당시 일본군은 센고쿠 시대부터 전래된 조총(화기)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아이누 족의 무기는 화살에 불과해 전력 차이가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누 족은 결사항전을 외치며 끝까지 저항했으나, 전쟁 장기화로 인해 마쓰마에 번의 교역 이익이 위협받게 되자, 일본 측은 화해를 제안한다.
샤쿠샤인은 상황의 장기화를 우려해 화해에 응하고 마쓰마에 성으로 초대되어 잔치에 참석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마쓰마에 번의 계략이었으며, 샤쿠샤인은 숨어 있던 일본 병사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다른 부족장들 또한 같은 운명을 맞는다.
이후 지도자를 잃은 아이누 족은 점차 세력을 잃고 약화되기 시작하며, 이 반란은 아이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저항으로 기록된다.
쿠나시르・메나시 전투
일본인들이 에조치로 점차 진출하면서 아이누 족은 자신들의 전통 어장에서조차 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었고, 혹독한 환경 속에서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분노한 아이누 족은 1789년, 현재의 쿠릴 열도와 메나시 지역에서 다시 봉기를 일으킨다. ⚔️
하지만 조직적인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아이누 족은 일본군에 의해 쉽게 진압되었고, 봉기는 오래가지 못해 종료되었다.
이후 이 사건에 관련된 인물 71명이 마쓰마에 성에서 처형되는 참극이 벌어지며, 이 사건은 '쿠나시르・메나시 전투'로 불리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에도 막부는 에조치에 일본인 주민을 본격적으로 이주시켜 동화를 가속화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일본 최초의 개항
1853년, 미국 함대가 일본 에도만(현 도쿄만)에 진입하여 개항을 요구한 쿠로후네(黒船)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미 해군 페리 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에도 막부에 무력 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막부는 군사적 열세로 인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하코다테와 시모다가 개항되었으며, 이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개항이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 측에 매우 불리한 내용이 많았다.
이후 하코다테를 비롯해 나가사키, 고베, 니가타, 요코하마 등의 항구들도 순차적으로 개항되며 외세의 영향력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미군의 압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에도 막부의 무력함은 전국 각지의 도메이(번)들에게 실망을 안겼고, 그중에서도 사쓰마번과 죠슈번은 막부 타도를 외치며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67년, 막부는 '대정봉환'을 통해 정치 권한을 덴노에게 반환하지만, 약 700년간 이어온 막부 체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비록 덴노가 명목상 통치권을 회복했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비롯한 도쿠가와 가문은 여전히 실질적인 권한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보신전쟁
에도 막부의 약화와 불평등 조약 체결에 불만을 품은 사쓰마번, 죠슈번 등 4개의 신정부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교토를 점령하고 덴노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1868년 1월, 메이지 덴노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왕정복고 대호령'을 선포하며 통치 권한 반납을 요구한다.
요시노부는 이를 거부한 채 미국의 지지를 배경으로 시간을 끌며 신정부군의 내부 분열을 기대한다. 하지만 신정부군은 에도에 낭인들을 보내 방화와 살인을 유도해 치안 불안을 조성했고, 이에 도쿠가와 측도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면서 막부의 마지막 전쟁, 보신전쟁이 시작된다.
1) 교토 전투와 도망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교토로 진격하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5천 명의 신정부군에게 밀리게 된다. 이후 요시노부는 오사카 성에 병력을 남긴 채 도망쳐 에도로 돌아가고, 요시노부를 역적으로 선언한 신정부군은 전국의 지지를 받게 된다.
2) 에도 무혈개성
요시노부가 도망친 후, 막부 해군 총재 카츠 카이슈와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협상을 통해 에도성을 무혈로 개성하게 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일부 막부군은 우에노와 우쓰노미야에서 저항하지만 신정부군에 의해 진압된다.
동북 지방의 막부 지지 번들은 연합하여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결성하며 저항을 이어간다.
3) 에도 공화국 수립
막부 해군 부총재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오우에쓰 열번동맹에는 합류하지 않고, 요시노부의 안전이 보장되자 에조치(현재 홋카이도)에 독립 정권을 수립할 계획을 세운다. 센다이에서 3천 명의 병력을 추가로 확보한 뒤, 하코다테에 상륙하여 ‘에조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주 함대가 좌초되고, 철갑함 ‘코테츠’가 미국에서 신정부군에 넘어가며 에노모토 측은 해상 전력에서 열세에 놓인다. 선제공격을 감행하지만 실패하고, 신정부군은 1869년 봄 하코다테에 본격 진격한다.

4) 보신전쟁의 종결
신정부군 참모 구로다 기요타카는 에노모토에게 항복을 권한다. 에노모토는 자신이 번역한 국제법 서적 '만국해율전서'를 구로다에게 보내며 책만은 보존해달라고 요청하고, 구로다는 이에 감동하여 술과 참치를 보낸다.
다음 날 아침까지 휴전을 요청한 에노모토는 결국 항복을 수용하게 되고, 일본 마지막 내전인 보신전쟁은 이로써 끝을 맺는다.
일본에 다테 시(市)가 두 개인 이유
보신전쟁에서 패배한 센다이번의 무장 다테 쿠니시게(伊達邦成)는 24만 석에 달하던 영토를 몰수당하고 단 58석의 영지만을 부여받는다. 생존을 위해 그는 신정부에 홋카이도 이주를 요청하게 된다.
신정부는 아무런 보상 없이 단지 사무라이 신분만 유지하는 조건으로 이를 허가하고, 쿠니시게를 포함한 가신과 가족 약 2,800명이 12년에 걸쳐 홋카이도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은 몬베쓰(紋別)라 불리던 땅을 개척하며, 서양식 농업을 일본에서 최초로 시도하고 미국에서 농기계를 도입해 농업 현대화의 기초를 마련한다. 이러한 공로로 메이지 정부는 쿠니시게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하고, 마을 이름도 다테무라(伊達村)로 개칭된다.
이후 다테무라는 1972년에 홋카이도 다테시(伊達市)로 승격되었다.
한편, 2006년에는 후쿠시마현에도 같은 이름의 다테시가 생겨난다. 이는 센다이번의 후손들이 정착한 지역의 여러 정(町)이 통합되면서 탄생한 도시로, 홋카이도 다테시의 허락을 얻어 한자까지 동일한 도시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1) 다테 마사무네 가문과의 관계
- 다테 쿠니시게는 센고쿠 시대의 명장 다테 마사무네의 가문 중 하나인 와타리 다테(亘理伊達) 가문 14대 당주다.
- 다테 마사무네는 초승달 투구를 쓴 애꾸눈 장수로 잘 알려져 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거성 이전을 허락받아 센다이 성을 축성했다.
- 이로 인해 센다이번은 흔히 다테 가문(伊達家)의 번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마사무네는 임진왜란에도 참여한 경력이 있다.

2) 동일한 도시 이름의 사례
일본에는 다테시 외에도 동일한 이름의 도시가 몇 곳 존재한다. 예를 들어, 도쿄도와 히로시마현에 존재하는 '후추시(府中市)'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참고로 홋카이도 다테시와 후쿠시마 다테시는 자매결연을 맺고 있지 않다는 점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홋카이도 개척사
메이지 정부는 일본이 두 개의 국가로 분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1869년 에조치의 이름을 '홋카이도'로 변경하며 본격적인 개척 정책을 시작하였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대응이었다.
특히 홋카이도에서 가장 평지가 넓은 지역인 '이시카리 평야'에 개척사를 설치하고, 후에 일본 제2대 총리가 되는 구로다 기요타카를 개척사 차관으로 임명하였다.
- 1869년은 홋카이도 개척의 시작점으로 평가된다.
구로다는 미국에 협력을 요청하여 미국 농무국 국장과 지질학자들을 홋카이도에 초빙하였고, 이들은 약 3년간 삿포로의 도시계획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삿포로는 네모 반듯한 블록형 도시 구조를 갖추게 되었으며, 기존의 벼농사보다는 밭농사와 축산업 중심의 서양식 농업이 더 적합하다는 제언이 이어졌다.
구로다는 이 제안을 수용하여, 이주민들에게 축산업을 가르치기 위해 분야별 미국 지도자들을 초빙하였다. 이 중 한 명이 바로 삿포로 농학교(현 홋카이도 대학) 초대 교장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이다.
그는 8개월간 재임 후 귀국하며 다음과 같은 훈화를 남긴다.
클라크 교장의 훈화
“Boys, be ambitious!
Be ambitious not for money or for selfish aggrandizement, not for that evanescent thing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the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돈이나 명예 같은 덧없는 것들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이루어야 할 것들을 향해 야망을 품으라!
이후 1876년 개척사는 '개척사 맥주 양조소'를 설립하고, 자체 품종 개발 및 전 세계에서 맥주 효모를 수집하며 맥주 산업에 힘을 쏟는다.
1877년에는 일본 최초의 맥주인 '삿포로 라거'를 출시하게 되며, 오늘날의 삿포로 맥주로 이어진다.
개척사 시절부터 시작된 축산업과 밭농업 중심의 개척 덕분에, 오늘날 홋카이도는 일본의 식량창고로 불린다. 특히 다음과 같은 식량 생산량을 자랑한다.
- 소고기: 일본 전체의 약 20%
- 우유: 50%
- 감자: 80%
- 콩: 90%
아이누 족의 현재
메이지 정부는 개척사 설립과 함께 이주 정책을 펼치며, 1899년에는 '구토인 보호법'을 제정하였다. 이는 명목상 보호를 위한 법이었으나, 실제로는 동화 정책이라는 이름의 차별 정책이었다.
이 법 아래에서 아이누 족은 토지를 빼앗기고, 고유 언어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받았다. 고유한 풍습마저 금지되었다.
수 세기 동안 수렵을 통해 생활해 온 아이누 족은 수렵까지 금지당하였으며, 정부로부터 받은 토지 역시 농경 경험이 없던 이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이 토지를 헐값에 일본인에게 매각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아이누 족은 점차 몰락하며, 강제 징병, 강제 노동, 인체 실험 등에 동원되었고, 여성들 역시 차별적 처우를 받았다.
'구토인(舊土人)'이라는 단어는 '원래 이 땅에 살던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으나, 일본 본토인과 구별하기 위한 표현으로 자연스러운 차별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일부 일본 인류학자들은 아이누 족을 ‘인간의 미진화된 형태’로 간주하였고, 한때 일본 교과서에는 '홋카이도에는 사람 대신 곰과 아이누만 살았다'는 기술이 있을 정도였다.
아이누 족은 어릴 때부터 차별을 경험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결혼과 취업 등 사회 전반에서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1994년, 아이누인 최초의 국회의원 가야노 시게루가 등장하며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그는 아이누어 사전을 편찬하고 아이누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97년에는 '구토인 보호법'이 폐지되고, 아이누 문화 진흥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일본 정부는 단 한 차례의 공식 사과 없이, 2019년에야 아이누 족을 '원주민'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쿠릴 열도를 방문하여 '아이누 족을 러시아의 원주민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한 직후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영토 분쟁에서의 불리함을 의식해 급하게 인정한 것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현재 일본 내 아이누 족의 수는 약 1만 3천 명으로 추정되며, 아이누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는 단 2명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아이누 문화 보존을 위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으며, 국립 아이누 민족 박물관이 설립되는 등, 후손들도 자긍심을 갖고 문화를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