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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역사
여행에 빠질 수 없는게 바로 역사이고 역사가 있으므로 문화 유적지가 되고 관광지가 되는 것이다.
아무런 역사가 없는 곳은 그냥 무의미할 뿐인 것이다.
오키나와의 옛 이름인 류큐(琉球)는 '유리 류'의 '구슬 공'자로 '유리 구슬'이라는 뜻을 가진 아름다운 이름이다.
이런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류큐왕국이 어떻게 무너지고 왜 일본에 편입되었는지 알고 오키나와를 가면 여행의 즐거움이 10배는 될 것이다.
-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된 내용 미리보기
- 고려 삼별초군이 오키나와에?
- 율도국을 찾으러 오키나와에 온 홍길동?!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류큐 왕국
오키나와는 크게 보면 선사시대 - 구스쿠(城) 시대 & 삼산시대 - 류큐 왕국 1 - 류큐 왕국 2 - 오키나와 현 - 미국 통치기 - 오키나와 현으로 구분된다.
구스쿠(城) 시대
13세기 ~
13세기 이 전에는 오키나와 현지인들은 부족생활하며 채집과 수렵에 의존하면서 생활을 한 선사시대로 구분하고 그 이후 성(城)이 많이 지어진 시대를 구스쿠 시대라 한다.
일본 본토에서는 성(城)을 しろ라 쓰고 ‘시로’라고 읽는 반면 오키나와에서는 ぐすく(구스쿠)라고 읽어 구스쿠 시대라 한다.
천손씨 (天孫氏) 시대
오키나와 역사서인 중산세감(中山世鑑), 중산세보(中山世譜) 등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천제(天帝)가 여신 아마미쿄(阿摩美久)와 남신 시네리쿄(志仁禮久) 부부를 내려보내 류큐 열도를 만들게 했다.' 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때 하늘에서 내려온 아마미쿄가 처음 강림한 곳이 남부 지역에 있는 '세화우타키(斎場御嶽)' 라고 한다.
이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3남 2녀 중 첫 째가 천손씨(天孫氏)로 25대 17,802년간(오타 아님) 집권 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라기 보단 신화라 생각하면 되고 아래에 설명하겠지만 책 이름이 중산(中山)으로 시작되는걸 보면 '역사는 역시 승자의 기록' 인걸 알 수 있다.
슌텐(舜天) 시대
천손씨는 리유(利勇)에 의해 멸망하지만 이를 다시 물리친 이가 바로 우라소에(浦添) 지역의 아지(按司 - あじ)인 슌텐이다.
슌텐은 리유를 물리치고 중산왕(中山王)에 즉위한다.
하지만 슌텐 왕조는 73년간 집권하지만 중앙 집권체제라기 보단 여러 아지들의 수장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아지는 우리나라로 치면 '호족'과 비슷한 지방세력을 의미)
에이소(英祖) 시대
슌텐의 3대 왕인 기혼(義本)은 당시 역병이 발생하자 이를 책임지고 에이소에게 양위를 한다.
에이소는 천손씨의 후대라 알려져 있고, 그의 무덤은 지금도 남아 있는 우라소에 구스쿠(성)에 있는 우라소에 요도레(浦添ようどれ)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 중 '계유년 고려와장조'라고 적힌 기와가 발견이 된다.
우리나라와 오키나와의 관계 - ①
고려시대의 무장 세력인 삼별초가 삼별초의 난을 일으켜 전남 진도에 용장산성을 짓고 여몽연합군에 대항한다.
하지만 여몽연합군에 패하자 일부 삼별초는 제주도로 건너갔지만 1273년 12,000여명의 여몽 연합군에 의해 결국 진압이 되고야 만다.
우리나라 역사는 여기까지만 기록되어 있지만 흥미로운 사실이 오키나와에서 발견된다.
슈리성에서 '계유년 고려와장조'라고 적힌 기와가 발견된 것이다.
- 계유년: 제주도에서 삼별초가 진압된 연도인 1273년과 동일
- 고려와장조: '고려의 장인이 만든 기와' 라는 뜻
그리고 이 당시 가장 큰 성이였던 '우라소에 성' 에서도 동일하게 '계유년 고려와장조' 라고 적힌 기와가 나왔으며 추가로 연꽃 모양의 수막새가 출토되었는데 이 또한 삼별초가 근거지로 삼았던 전남 진도의 용장산성에서 나온 수막새와 모양과 형태가 비슷하다.
이는 일본 본토의 수막새와 다른 모양으로 삼별초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수막새는 기와 끝에 사용되던 기와를 말한다.)
오키나와와 큐슈 남쪽 지역의 가고시마 사이에 있는 도쿠노시마에는 기와를 굽는 '가마' 가 발견되기도 하며, 고려시대 유행했던 기와 모양인 물고기 뼈 모양의 문양인 어골무늬 기와도 많이 출토된다. (참고: 가마를 일본어로 かま(카마)로 동일하게 사용한다.)
이 뿐만 아니라 제주도에 있는 화장실과 돼지우리(돗통시)가 연결된 식의 화장실이 있기도 하고 돼지를 잡으면 돼지 머리를 포함해 거의 모든 부분을 다 먹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다. (오키나와 로컬 시장에 가면 일본 본토에서는 없는 돼지머리와 족발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에이소 4대 왕인 다마구스쿠(玉城)가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채 40살 나이에 죽자 당시 9살이던 세이이(西威)가 5대 왕이 되지만 결국 21살이 되던 1349년 에이소 왕조는 몰락하고 14세기 부터는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으로 나뉜 삼산 시대가 열린다.
우리나라와 오키나와와 비슷한 부분이 위에서 언급한 부분말고도 예전 오키나와 사람의 사진을 보면 상투를 튼다거나 청도 소싸움처럼 오키나와도 소싸움을 하는게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사자 탈춤도 있긴 하나 이건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있던 문화이다보니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말하긴 힘들거 같다.
그리고 어떤 이는 나하 대형 줄다리기를 고싸움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양쪽을 암수로 구분하는건 비슷하지만 줄다리기도 어느 나라에 있던 문화이며 양쪽에서 잡아 당겨 승패가 나는 놀이이다.
하지만 고싸움은 더 다이나믹하고 먼저 땅에 떨어지는 쪽이 지는 방식이라 고싸움은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라고 보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삼산(三山)시대
~ 1429년 까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중앙 집권 세력이 약해지면 지방 세력들이 힘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아지들이 세력을 키워 지금의 북부, 중부, 남부 지역을 구분 짓는 것과 동일하게 북산, 중산, 남산로 나뉘어 삼산시대가 시작된다.
이런 삼산시대는 1429년 중산의 의해 통일될 때까지 약 100여년간 이어진다.
북산
北山
1322년경 하니지(怕尼芝)가 사촌인 기존 아지인 나키진(今帰仁)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북산왕에 오르며 1416년 중산의 침략이 있을 때 까지 유지된다.
중산
中山
명나라가 세워지고 4년 후인 1372년에 명나라의 홍무제는 중산에 사절단을 파견해 조공을 요구한다.
중산은 다이키(泰期)를 조공사(공물을 바치기 위한 파견사)로 보내어 그 이후부터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를 류큐국임을 알리게 되고 류큐국의 중산왕이 있음을 대외적으로 알리게 된다.
그 이후 1380년과 1383년에는 남산과 북산도 명나라에게 조공을 하게 되지만 중산은 42회, 남산은 24회, 북산은 11회 한걸로 보아 중산의 국력이 삼산 중에서는 가장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였다.' 라고 나온걸 보면 조선 건국 당시부터 조선과 류쿠국은 교류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에 중산의 왕은 중산왕으로 남산 왕은 산남왕(山南王)으로 명시되어 있다.
남산
南山
1314년 경 오오자토(大里)의 아지였던 쇼삿토(승찰도-承察度)가 남부 지역 일대를 다스려 남산의 왕으로 즉위한다.
- 여기서 쇼삿토는 한 사람을 의미 하는게 아니라 대대로 물려주는 이름이라 추정
1388년도에는 쇼삿토의 삼촌 격인 오에이지(汪英紫)에게 왕위 자리를 빼앗겨 아들 쇼삿토를 먼저 조선으로 보낸다.
이에 당시 중산왕이었던 삿토(찰도-察度)는 혹시나 모를 후한을 두려워해 남산 왕의 아들 쇼삿토를 돌려 보내달라고 요청(조선왕조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1394))하지만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산 왕이던 쇼삿토는 4년후에 지금의 진주에 망명(조선왕조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1398))하지만 그 해 10월 사망한다.(조선왕조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1398))
삼산의 통일
지금의 오키나와 난조시의 아지(按司)인 쇼하시는 1406년 중부의 중산(中山)을 무너뜨리고 기존 수도인 우라소에에서 슈리로 옮기고 슈리성을 왕궁으로 삼는다.
1416년에는 북산 왕에게 불만을 품은 여러 아지들과 힘을 합쳐 북산의 수도 나키진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중산에 흡수시킨다.
그리고 1425년에는 명나라의 영락제가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을 책봉 받아 중산왕 즉위를 인정하며 1429년에는 마지막 남은 남부의 남산을 멸망시켜 오키나와를 통일하게 된다.
류큐 왕국 1
1429년 ~ 1609년
1429년에 세 나라로 분리된 오키나와를 통일해 명나라로 부터 받은 책봉 받은 유구국(琉球國)을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해 류큐 왕국이라 불렀다.
이 류큐 왕국이라는 호칭은 일본에 의해 합병되는 1879년까지 유지가 된다.
하지만 1453년 류큐 국왕 5대 쇼킨푸쿠(尚金福)가 죽고 왕위 계승 문제로 시로ㆍ후리의 난(志魯・布里の乱)에는 슈리성이 전소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또 우리나와와 연관된 재미난 설이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홍길동' 이다.
우리나라와 오키나와의 관계 - ②
홍길동은 단순히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실제 조선 시대에 있었던 도적이었다. 소설속의 홍길동은 신분 차별이 없는 이상적인 국가인 율도국을 지향했으며 그 율도국을 찾아 떠난다고 나온다.
소설 속의 율도국을 오키나와라고 하는 설이 있으며 오키나와에는 실제 율국(粟国-아구니)섬이 있다.
그럼 홍길동이 그렇게 원하던 율도국을 찾아 오키나와까지 왔던 것일까?
연산 6년(1500) 10월 22일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39권에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라는 글이 적혀 있다.
이 도둑이 착한 일을 했던 안 했던 조선시대에 홍길동이란 도둑은 있었던 사실이다.
하지만 실록 그 어디에도 이 이후의 사후처리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고, 23년 뒤 "중종18년(1523) 조선왕조실록에는 홍길동(洪吉同)의 옥사(獄事)를 거울삼을 만합니다." 라고만 나와 더욱더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는 의심을 갖게 된다.
당시 야에야마 제도의 이시가키섬과 미야코지마는 류큐 왕국에는 포함되지 않는 별도의 연합체였지만 15세기 들어 미야코지마의 아지는 류큐 왕국의 조공국이 된다.
류큐 왕국은 이시카키 섬의 아지인 오야케아카하치(オヤケアカハチ)에게도 조공을 요구하지만 이를 거절해 나름 자주적인 세력을 유지한다.
이 오야케아카하치로 다른 이름으로는 홍가왕(洪家王 - 홍가와라)이라 불리며, 감옥에 잡혔던 홍길동이 동해번쩍 서해번쩍 요술을 써서 감옥에서 도망가 그렇게 원하던 율도국을 찾아 오키나와까지 가지 않았나라는 설이다.
하지만 오야케아카하치는 류큐 왕국의 제거 대상이 되어 군선 100척, 병사 3000명과의 전투에서 패해 1500년 2월에 처형 당해, 1500년 10월에 홍길동이 잡혔으니 율도국을 찾아 오키나와를 갔다는 설은 신빙성이 낮다.
참고: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허균이 지었다고 알고 있다. 이는 허균의 제자인 이식이 쓴 택당집에서 "허균은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비겼다" 라는 문구만 나오고, 한글인지 한자인지 명시가 안 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 한글 홍길동 전에는 저자가 따로 명시되지 않았고, 허균이 죽고 난 후 70년 후의 일이 적혀 있어 최근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이 홍길동전이라는 부분에 대해 논란이 있다.
류큐 왕국 2
1609년 ~ 1879년
같은 류큐 왕국 시대이지만 1609년부터는 기존과 완전 다른 시기이므로 분리를 해야 한다.
바로 1609년에 지금의 가고시마 현의 사쓰마 번의 속국이 되는건데 여기에는 우리나라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 발발 8개월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쓰마 번의 번주 시마즈에게 1만 5천의 병력을 요구한다.
이에 시마즈는 류큐 왕국의 당시 왕인 쇼네이(尚寧) 왕에게 병력은 자신들이 충당 할테니 병력 절반의 열달치 군량을 요구하지만 쇼네이 왕은 이를 거절하고 당시 일본보단 우호적인 관계였던 조선과 명나라에게 일본이 침략할 예정임을 알린다.
하지만 사쓰마 군의 전투력은 당시 일본 최고이다보니 후환이 두려워 사쓰마 번에서 요구한 군량의 절반가량만 지원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이 끝이 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정권을 잡게 된다.
1602년 류큐 왕국의 선박이 센다이 번에 좌초하는데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류큐 왕국으로 돌려보내준다.
이에 사은사를 파견해 은혜를 보답하라는 요구를 하지만 쇼네이 왕은 이조차 거절한다.
그러다 1608년 이에야스 막부 초빙에도 따르지 않자 이에야스는 사쓰마에게 류큐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려 1609년 3월 이를 단행한다.
전쟁은 사실 게임도 안 되었다.
1429년 류큐 통일 이 후 단 한번도 전쟁을 하지 않은 류큐와 100여년의 전국시대를 거쳐 임진왜란을 치른 사쓰마 번의 군사력은 일본 본토에서도 알아주는 전투력이다 보니 하늘과 땅 차이.
결국 전쟁에서 참패한 쇼네이 왕은 류큐 왕국을 빼앗기고 사쓰마 번의 속국이 된다.
전쟁에 패한 류큐 왕국의 대가는 처참했다.
오키나와에서 북쪽에서 가장 가까운 요론섬 뿐만 아니라 류큐 왕국과 사쓰마 번 사이의 모든 섬들이 사쓰마 번에게 빼앗겨 지금도 가고시마 현으로 속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리고 사쓰마 번에서는 엄청난 공물을 강요당해 류큐 인근의 섬 주민들에게 인두세를 걷었고 이를 내지 못하면 나고(名子)라고 해서 노예 농민이 되어야만 했다.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을 완전히 정벌하진 않고 왕국 체제는 유지 시킨다.
대외적으로는 류큐 왕국이 독립국으로 보이게 한 건데 임진왜란에서 조명 연합군에게 패한 일본군의 입장에서 류큐 왕국을 식민지화 했음을 밝히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슈리성에는 중국 사신이 오면 만나는 곳과 일본 사신이 오면 만나는 곳을 따로 두어 철저히 감시해 중국은 청나라 말기까지 류큐 왕국이 사쓰마의 속국이라는걸 전혀 몰랐을 정도이다.
이에 류큐는 명나라를 이은 청나라와 사쓰마 번의 속국이 되어 각각 조공하게 된다.
당시 류큐에는 중국에서 설탕 제조법을 들여와 설탕을 생산하게 되는데 이 때는 설탕이 아주 귀할 때라 귀족들만 살 수 있는 사치품이였다.
아열대 기후인 류큐에서는 사탕수수가 잘 자라는 환경이다 보니 설탕 생산량이 늘었지만 그 이득은 모두 사쓰마 번이 자치를 한다.
이를 통해 에도 막부 말기 시절 삿초 동맹(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동맹)의 기반을 발판삼게 되고 오키나와인들은 그와 반대로 일본 정부를 반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세기 들어서 류큐에도 서양 세력이 들어오게 된다.
먼저 프랑스가 먼저 포교 및 무역을 요구하지만 그 당시 일본에서는 천주교를 탄압하던 시기라 포교는 절대 안 되고 무역만 하게 허용한다.
그 뒤를 이어 1854년 페리제독이 일본 본토에 쿠로후네(黒船 - 검은배) 사건이 일어나 미일화친 조약을 맺으며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한다.
이에 추가로 나하 항도 개항을 요구하지만 일본 정부는 중국에게 류큐가 자신들의 속국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류큐는 멀리 떨어진 독립국가로서 일본은 나하항의 개방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거짓말을 한다.
이를 받아 들인 미군은 쿠로후네를 끌고 류큐로 가 개항을 요구하고 류큐 왕국은 막부와 사쓰마 번의 허락을 받고 '미류수호조약' 을 체결한다.
류큐 왕국은 마지막 희망으로 청나라에게 원조를 요청하지만 당시 청나라도 좋은 상황이 아니다 보니 지원을 해줄 입장은 아니였다.
이를 알게된 메이지 정부는 류큐를 완전히 지배하고자 마음 먹게 된다.
오키나와 현
1879년 ~1945년
메이지 유신이 들어선 메이지 정부는 1897년 류큐 왕국을 번으로 강등하고 당시 류큐국 중산왕인 쇼타이(尚泰)를 류큐국번왕으로 강등시킨다.
이를 '제 1차 류큐 처분'이라 한다.
1879년에 드디어 메이지 정부는 류큐번을 가고시마 현으로 잠시 편입 시킨 뒤 오키나와 현으로 설치하며 류큐국번왕으로 강등당한 쇼타이를 도쿄로 압송하고 또 다시 후작으로 강등시켜 이로써 '제 2차 류큐 처분'이 일어난다.
이로써 류큐 왕국은 1429년 통일 이후 450년에 이르는 류큐 왕북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이 소식은 조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주변국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결국은 우리가 다 아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류큐 왕국은 독립된 국가로 이 당시까지 우치나구치(沖縄口)라는 류큐어를 사용했는데 메이지 정부는 본토와의 일원환 정책으로 우치나구치를 사용 못 하게 한 적이 있다.
만약 학교에서 우치나구치를 쓰면 목에 방언찰(方言札)이라고 쓰인 나무 목판을 목에 걸고 다녀야 하고 이를 벗기 위해서는 다른 친구가 우치나구치를 사용하는것을 발견해야지만 그 친구에게 방언찰을 주고 자신은 해방이 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끔찍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제도는 1960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점점 본토의 미디어가 반입되면서 부터 점점 사라졌다.
미국 통치기
1945년 ~ 1972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다.
이에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대응과 아시아의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해 중국 장제스, 미국 루스벨트, 영국 윈스턴 처칠의 3개국 대표가 모여 협의가 이뤄진다.
주요 안건은 다음과 같다.
- 일본의 무조건 항복
-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뺏은 식민지 반환
- 한국의 독립 보장
여기에는 오키나와에 대한 언급이 따로 없어 말 그대로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된다.
하지만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미국과 중국의 사이가 좋아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오키나와를 중국으로 편입을 하는게 좋겠다고 권유하지만 당시 장제스는 만주와 타이완만 챙기고 중국의 공산화를 막는게 더 시급했기 때문에 이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에 장제스는 '중국 4천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냈다' 며 크게 감동한다.
이 사건 이후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 정부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되고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에서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하게 되어 한국 독립 보장이라는 내용이 안건으로 채택이 된다.
만약 윤봉길 의사의 고귀한 희생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도 오키나와처럼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될 수 있었고 독립을 못 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막간 상식: 의사는 무력을 동원해 항거했을 때 붙이고, 열사는 별다른 무력없이 맨몸으로 항거한 분들에게 붙인다.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등)
그로부터 2년 후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전투가 일어난다.
당시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군에게 강제로 전투에 투입되거나 전쟁의 총알받이가 되었는데 반대로 미군에게 협조를 하면 물자를 주었고 안전까지 보장해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오키나와 인들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미군 포로가 되면 여자들은 능멸을 당하고 남자들은 사지가 찢겨 죽는다' 라는 소문을 내어 포로가 되기 전 자결하라는 집단 자결령을 내려 주민들과 가족들을 서로 죽이게 하고 이를 못하면 폭탄을 던져 죽이기도 했다.
3개월간의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미군은 1만 2천여명 전사, 일본군은 8만~10만명의 전사자를 낸 전쟁은 결국 미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미군도 이 전쟁에서 많은 전사자가 발생해 더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 안 되는 판단에 미군은 일본에 핵폭탄 사용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 폭탄이 투하되었지만 일본은 항복을 하지 않고 당시 지원군인 소련군을 기다리고 있다가 3일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한 번 더 투하되고 나서야 일본은 항복을 하게 된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오키나와는 미군의 군용지로 사용되며 오키나와인들은 수용소에 가둬 지내게 된다.
이렇게 미군 통치기가 시작되어 본격적으로 미국 문화를 영향 받게 되어 포크타마고, 타코라이스, 루트비어, A&W 버거 등 미국 스타일의 요리가 오키나와에서 유명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미국의 장기 지배가 이어지자 오키나와 내에서는 반발이 일어난다.
사라진 류큐국을 부활시켜 독립을 할지 아니면 일본에 복귀하여 살지 또는 지금처럼 미국의 통치하에 살지에 대해 논의가 이뤄진다.
결국 일본 복귀 여론이 형성되고 일본 복귀 운동이 1972년 오키나와 최북단 '헤도곶' 에서 일어난다.
오키나와
1972년 ~ 현재
1972년 오키나와 내에서 일어난 일본 복귀 운동이 점점 거세져 미군은 오키나와 미군 기지의 사용권과 기능은 유지하되 나머지 관할권은 일본에 반환한다.
하지만 '류큐 처분' 으로 인해 자신들의 나라가 없어지고 태평양 전쟁 때의 일 때문에 오키나와 현지인들은 일본정부에 대한 반감이 크다.
그래서 오키나와 학교에서는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 를 가르치지도 않고 오키나와 출신 유명 연예인들도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오키나와 현지인들은 자신들은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 인이라고 구분지어 말한다.
또한 1945년 오키나와 전투 때의 일로 일왕은 오키나와를 방문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 본토인 조차 오키나와를 부를 때 '남국(南国)' 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