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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역사
여행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역사이다. 역사가 존재하기에 문화유산이 탄생하고, 그것이 곧 관광 자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키나와의 옛 이름인 류큐(琉球)는 '유리 류(琉)'와 '구슬 구(球)'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리 구슬'이라는 뜻을 지닌 아름다운 명칭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류큐 왕국이 어떻게 멸망하고, 왜 일본에 편입되었는지를 이해한 뒤 오키나와를 여행한다면, 그 여정은 더욱 깊이 있고 풍성한 경험이 될 것이다. ✨
📌 우리 역사와 연결된 흥미로운 이야기 미리보기
- 고려 삼별초군이 오키나와에 정착했을지도?
- 율도국을 찾아 홍길동이 향한 곳은 오키나와?
-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류큐 왕국
오키나와의 역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선사시대 → 구스쿠(城) 시대 & 삼산 시대 → 류큐 왕국 전기 → 류큐 왕국 후기 (사쓰마 번 지배) → 오키나와 현(일본 편입) → 미국 통치기 → 재일본 복귀 이후의 오키나와 현
구스쿠(城) 시대
13세기 ~
13세기 이전 오키나와는 채집과 수렵에 의존하는 부족 사회로, 이 시기는 선사시대로 분류된다. 이후 여러 지역에 성(城)이 축조되기 시작한 시대를 구스쿠 시대라 부른다.
일본 본토에서는 성(城)을 'しろ(시로)'라 읽는 반면, 오키나와에서는 'ぐすく(구스쿠)'라고 읽는다. 이 차이로 인해 해당 시기를 '구스쿠 시대'라 명명하게 된 것이다.
1) 천손씨 (天孫氏) 시대
오키나와의 역사서 《중산세감(中山世鑑)》과 《중산세보(中山世譜)》에 따르면, 하늘의 황제인 천제(天帝)가 여신 아마미쿄(阿摩美久)와 남신 시네리쿄(志仁禮久) 부부를 이 땅에 내려보내 류큐 열도를 창조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전승에 따르면, 아마미쿄가 처음 내려온 곳은 오키나와 남부의 '세화우타키(斎場御嶽)'이다.
두 신의 장남이 바로 천손씨(天孫氏)로, 그는 25대에 걸쳐 총 17,802년 동안 통치했다고 전해진다. (※ 신화적 설정으로 해석됨)

이러한 서술은 실제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적 기원설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중산세보》 및 《중산세감》이 '중산(中山)' 중심으로 서술된 점에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관점이 떠오른다.
2) 슌텐(舜天) 시대
천손씨는 지역 세력가 리유(利勇)에 의해 멸망하지만, 그를 물리친 인물이 우라소에(浦添) 지역의 아지(按司, 지방 영주)였던 슌텐이다.
슌텐은 중산왕에 즉위하여 슌텐 왕조를 시작하였으며, 이는 약 73년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는 중앙집권보다는 여러 아지들의 연합체에 가까웠다. 여기서 '아지'는 우리나라의 호족과 유사한 지방 세력이라 할 수 있다.

3) 에이소(英祖) 시대
슌텐 왕조의 3대 왕 기혼(義本)은 재위 중 역병이 발생하자, 에이소(英祖)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에이소는 천손씨의 후손으로 전해지며, 그의 묘는 우라소에 구스쿠(浦添城)에 있는 '우라소에 요도레(浦添ようどれ)'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계유년 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이는 고려와의 역사적 연결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고려 삼별초군이 오키나와에?
삼별초는 원나라와의 강화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킨 고려의 무장 집단으로, 1273년 제주에서 여몽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슈리성과 우라소에성에서 '계유년 고려와장조'라고 적힌 기와가 출토되었다.
- 계유년 = 삼별초의 최후 해인 1273년
- 고려와장조 = '고려 장인이 만든 기와'
특히 연꽃 문양의 수막새는 전남 진도 용장산성 출토품과 매우 유사하며, 일본 본토와는 다른 양식이라는 점에서 삼별초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 수막새: 기와 끝에 장식으로 붙이는 부속 기와
또한 도쿠노시마(徳之島)에서 고려식 어골문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가마까지 발견되었다. (일본어로도 가마는 'かま(카마)')
오키나와에는 돼지우리와 연결된 전통 화장실 구조와 돼지 머리와 족발을 먹는 식문화가 존재하여 제주도와 매우 유사한 생활양식이 이어지고 있다.
관련 내용은 "KBS 역사추적 -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이소의 4대 왕 다마구스쿠(玉城)는 국정에 소홀하다가 40세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세이이(西威)가 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정치 기반이 약했던 세이이는 21세 되던 해인 1349년, 왕조를 잃고 만다.
이후 14세기에는 북산·중산·남산으로 분열된 삼산시대(三山時代)가 개막된다.
📷 옛 오키나와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 상투를 튼 모습이나, 청도와 유사한 소싸움 전통 등을 통해 우리나라와 닮은 점이 적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산(三山) 시대
~ 1429년까지
중앙집권 체제가 약화되면 지방 세력의 부상이 나타나는 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오키나와에서도 각지의 아지(按司, 지방 유력자)들이 세력을 키우며, 북부·중부·남부에 각각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이라는 삼국이 성립되어 '삼산(三山)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시대는 약 100년간 지속되었으며, 1429년 중산에 의해 통일되면서 막을 내린다.
1) 북산
北山
1322년경, 하니지(怕尼芝)는 사촌인 기존 나키진 아지(今帰仁按司)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북산왕에 즉위하였다.
북산은 이후 1416년 중산의 침공으로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2) 중산
中山
1372년, 명나라 건국 4년째에 홍무제가 중산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에 다이키(泰期)를 조공사로 보내며 명과의 외교가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류큐국(琉球國)'이라는 명칭과 중산왕의 존재가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중산은 명나라에 총 42차례 조공하였으며, 이는 남산(24회), 북산(11회)보다 현저히 많은 수치로, 중산의 국력이 가장 강력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에는 '유구국의 중산왕이 사신을 보내 조회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실록에서는 중산왕은 그대로 표기되며, 남산왕은 '산남왕(山南王)'으로 기록된다.
3) 남산
南山
1314년경, 오오자토(大里)의 아지였던 쇼삿토(승찰도·承察度)가 남부를 장악하고 남산왕에 즉위하였다.
'쇼삿토'는 단일 인물명이 아니라 세습된 칭호로 보는 견해가 있다.
1388년, 삼촌 격인 오에이지(汪英紫)가 왕위를 찬탈하자, 쇼삿토는 아들을 조선으로 피신시켰다.
중산왕이던 삿토(찰도·察度)는 조선에 아들의 송환을 요청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하였다.(『태조실록』 제13권, 1398)
이후 쇼삿토는 진주로 망명하였고, 같은 해 10월 사망하였다.(『태조실록』 제15권, 1398)
4) 삼산의 통일
중산 지역의 유력 아지였던 쇼하시(尚巴志)는 1406년 중산을 장악하고 수도를 우라소에에서 슈리로 옮기며 슈리성을 왕궁으로 삼았다.
1416년에는 북산 왕에 반발하던 아지들과 연합하여 나키진을 공격, 북산을 멸망시켰다.
1425년에는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류큐국 중산왕으로 공식 책봉되었으며, 1429년에는 남산을 정복하면서 삼산을 통일하고 류큐 왕국을 세우게 된다. 🏯
류큐 왕국
1429년 ~ 1609년
1429년, 삼산으로 분열되어 있던 오키나와를 통일한 중산의 왕 쇼하시(尚巴志)는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유구국(琉球國)'이라는 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류큐 왕국’이라는 명칭이 정착되었다.
이 국호는 1879년 일본에 병합되기 전까지 약 450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1453년, 제5대 국왕 쇼킨푸쿠(尚金福)의 사망 이후 '시로ㆍ후리의 난(志魯・布里の乱)'이 발발하며 슈리성이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홍길동과 오키나와, 율도국의 전설
이 시기와 관련하여 한국과 오키나와를 연결하는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바로 홍길동과 율도국에 관한 이야기이다.
홍길동은 소설 속 허구의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실존 인물로서 반역자로 기록되어 있다. 소설 속 홍길동은 신분 차별이 없는 이상향 '율도국'을 찾아 떠난다.
그런데 오키나와 인근에는 실제로 '율국(粟国, 아구니)'이라는 섬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홍길동이 율도국을 찾아 오키나와로 향했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연산군일기, 연산 6년(1500) 10월 22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그러나 이후 그의 행방에 대한 실록상의 기록은 소멸되며, 『중종실록』 중종 18년(1523)에서는 단 한 차례 “홍길동의 옥사를 거울삼을 만하다”는 언급만이 전해진다. 이로 인해 그가 도피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 류큐 왕국의 확장과 ‘홍가왕’ 전설
15세기 당시 류큐 왕국은 주변 제도들을 차례로 복속하고 있었다. 이시가키섬과 미야코지마는 당초 독립적 연합체였으나, 이후 미야코지마는 류큐의 조공국이 된다.
이시가키섬의 아지 오야케 아카하치(オヤケアカハチ)는 조공 요구를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걷는다.
흥미롭게도, 오야케 아카하치의 다른 이름으로 ‘홍가왕(洪家王, 홍가와라)’이 전해지며, '옥에 갇힌 홍길동이 마법 같은 능력으로 탈출해 율도국을 찾아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는 전설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두 인물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오야케 아카하치는 1500년 2월 전투에서 패배 후 처형되었고, 그해 10월 조선에서는 홍길동 체포 소식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 『홍길동전』과 허균의 관계
『홍길동전』은 한국 최초의 한글 소설로 흔히 허균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허균의 제자 이식이 남긴 『택당집』의 다음 구절에 기초한 것이다.
“허균은 <수호전>을 본떠 『홍길동전』을 지었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홍길동전』이 한글 소설인지 한문 소설인지, 저자가 누구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실제 전해지는 책에도 저자명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더불어, 본문에는 허균 사망 후 70년 뒤 인물이 등장하는 부분이 있어 허균 저작설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류큐 왕국 후기와 사쓰마 번의 지배
1609년 ~ 1879년
비록 하나의 류큐 왕국 시대로 분류되지만, 1609년 이후는 정치·외교적 상황이 전기와 완전히 달라 후기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609년, 류큐 왕국은 지금의 가고시마현에 해당하는 사쓰마 번(薩摩藩)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임진왜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 발발 약 8개월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쓰마 번주 시마즈 가문에 15,000명의 병력을 징발하였고, 시마즈는 류큐 국왕 쇼네이(尚寧)에게 그 절반에 해당하는 군량을 요청하였다.
쇼네이 왕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조선과 명나라에 일본의 침략을 알리는 외교적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쓰마의 강압에 못 이겨 일부 군량을 제공하게 된다.

⚔️ 사쓰마의 침공과 속국화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함께 임진왜란이 종료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야스는 1602년, 류큐 선박이 센다이 번에 표류하자 본국 송환을 요청하며 감사 사절 파견을 요구하였으나, 쇼네이 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결국 1609년 3월, 이에야스는 사쓰마 번에 류큐 정벌을 명하고, 사쓰마 군은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하였다.
전투 경험이 거의 없던 류큐와, 전국시대·임진왜란을 거친 사쓰마 번 사이의 전력 차이는 극명했고, 결국 왕 쇼네이는 항복하였다.
💰 전쟁의 대가와 통치 전략
전쟁 이후, 요론섬(与論島)을 포함한 류큐~사쓰마 사이의 모든 섬이 사쓰마에 귀속되었고, 오늘날 이 지역들이 가고시마현에 포함되는 배경이 되었다.
사쓰마 번은 류큐에 무거운 조공을 부과했고, 감당하지 못한 주민들은 '나고(名子)'라 불리는 노예 농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쓰마는 형식적 독립국 체제를 유지시키며, 중국과의 조공 외교를 지속하였다. 이는 외교적 위신을 유지하려는 전략이었고, 실제로 청나라는 류큐가 속국인 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
슈리성(首里城)에는 중국 사신용, 일본 사신용 접견 공간을 따로 마련해 철저히 이중 외교를 수행하였다.
이후 류큐는 청과 사쓰마 양측에 조공을 바치는 이중 조공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 설탕 산업과 사쓰마의 착취
청나라로부터 전래된 설탕 제조 기술로 류큐에서는 사탕수수 재배가 활발해졌고, 설탕은 주요 산업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 수익은 사쓰마 번이 독점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쓰마는 막부 말기의 삿초 동맹(薩長同盟)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반면 오키나와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에 대한 반감이 점차 커져만 갔다.
🚢 서양 세력의 접근과 개항 압박
19세기 들어 서양 세력의 접근이 시작되었고, 프랑스가 먼저 선교 및 무역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포교를 금지하고 무역만 허용하였다.
1854년, 페리 제독의 ‘쿠로후네(黒船)’ 사건 이후 시모다·하코다테 개항이 이뤄졌고, 미국은 나하항 개항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이를 피하기 위해 '류큐는 일본과 다른 독립국이며, 개항권한이 없다'는 허위 해명을 내세웠다.

이에 미국은 직접 함대를 나하로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고, 결국 미·류 수호조약(琉米修好条約)이 체결되기에 이른다.
🧭 청에 원조를 요청한 류큐
위기를 자각한 류큐 왕국은 청나라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당시 청은 아편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실질적 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러한 외교적 공백을 확인한 메이지 정부는 결국 류큐 병합을 결단하게 된다.
오키나와 현
1879년 ~ 1945년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서두르던 메이지 정부는 1872년, 류큐 왕국을 ‘류큐번(琉球藩)’으로 격하시키고 당시 국왕이었던 쇼타이(尚泰)를 ‘류큐번왕’으로 낮추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사건은 ‘제1차 류큐 처분’이라 불린다.
이어서 1879년, 메이지 정부는 류큐번을 일시적으로 가고시마현에 편입시킨 뒤, 독립된 행정구역인 ‘오키나와현(沖縄県)’으로 재설치하였다.
이와 함께 쇼타이를 도쿄로 강제 이주시켜 후작(侯爵)으로 격하하면서, 450년 넘게 이어진 류큐 왕국은 완전히 해체된다.
이 조치는 ‘제2차 류큐 처분’으로 불리며, 1429년 통일 이래 존속하던 왕국 체제가 공식적으로 소멸하는 계기가 된다.
🌏 동아시아에 미친 파장
이 사건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는 전환점이 되었다.
특히 류큐 병합은 이후 조선 병합과도 궤를 같이하는 제국주의 팽창의 상징적 선례로 평가된다.
🈳 언어 말살 정책과 방언찰 제도
당시 류큐 왕국 내에서는 고유 언어인 ‘우치나구치(沖縄口, 류큐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동화 정책(일원화 정책)’의 일환으로 류큐어 사용을 억압하며, 일본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제하였다.
특히 학교 교육 현장에서는 우치나구치를 사용할 경우 ‘방언찰(方言札)’이라 적힌 목판을 목에 걸게 하는 처벌이 시행되었다.
이 방언찰을 벗기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우치나구치를 쓰는 장면을 신고해야만 했으며, 이로 인해 학생들 사이의 감시와 고발이 조장되었다.
해당 제도는 언어와 문화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도록 유도한 심리적 억압 정책으로, 일부 지역에서는 1960년대까지 비공식적으로 지속되었다.
이후 일본 본토의 방송과 미디어 보급을 계기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미국 통치기
1945년 ~ 1972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전후 일본 처리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중국·미국·영국 3개국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이를 카이로 회담(Cairo Conference)이라 한다.
당시 주요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 일본의 무조건 항복 요구
- 일본이 중국에서 빼앗은 영토의 반환
- 한국의 독립 보장
그러나 오키나와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포함되지 않아, 향후 귀속 문제는 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오키나와를 중국령으로 편입할 것을 장제스(蔣介石)에게 제안하였으나, 장제스는 만주와 타이완 회복 및 내전 대응을 우선시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 윤봉길 의사의 영향, 카이로 회담의 뒷이야기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은 장제스 총통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중국 4억 인민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실질적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장제스는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만약 윤봉길 의사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 또한 오키나와처럼 독립 보장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 참고: '의사'는 무력 항쟁에 참여한 인물(예: 안중근 의사), '열사'는 비무장 상태에서 항거한 인물(예: 유관순 열사)을 뜻한다.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였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 동원되었으며, 일부는 총알받이로 희생되었다. 반면 미군은 협조적인 주민들에게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며 일정한 안전을 보장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포로가 되면 참혹하게 죽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자결을 명령하며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실제로 가족 간에 목숨을 끊게 하거나 명령 불이행 시 폭사시키는 일도 발생했다.
3개월간의 전투 끝에 미군은 약 12,000명, 일본군은 80,000~100,000명의 전사자를 기록하며, 미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미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에, 핵무기 사용 결정의 배경이 되었다.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 투하
-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투하
이후 일본은 항복하였고, 오키나와는 미군 군정 하에 놓이게 된다. 주민들은 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오키나와는 미군 군사기지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 미국 문화의 유입
이 시기부터 오키나와는 미국 문화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음식이 대중화되었다:
- 포크타마고 (스팸 계란 볶음)
- 타코라이스 🌮
- A&W 버거 🍔, 루트비어 🥤
🗳️ 오키나와의 진로 논쟁
미국의 장기 통치가 이어지자, 오키나와 내부에서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충돌하였다:
- 사라진 류큐 왕국의 독립과 부활을 주장하는 세력
- 일본 복귀를 주장하는 세력
- 현상 유지(미국령 유지)를 선호하는 세력
점차 일본 복귀를 지지하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1972년 오키나와 최북단 ‘헤도곶(辺戸岬)’에서 복귀 운동이 시작되었다.

오키나와
1972년 ~ 현재
1972년, 점차 거세진 일본 복귀 운동의 영향으로, 미군은 오키나와 미군 기지의 사용권과 전략적 기능은 유지하되, 그 외 행정 관할권은 일본 정부에 반환하였다.
이를 통해 오키나와는 명목상 일본의 일부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 '류큐 처분'을 통한 강제 합병, 그리고 태평양 전쟁 당시 오키나와 전투의 비극적 경험으로 인해, 오키나와 주민들 사이에서는 일본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감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키나와 현의 학교에서는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를 가르치지 않으며, 오키나와 출신 연예인들 역시 공식 석상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처럼 정체성에 대한 인식 차이로 인해,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은 자신을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인(우치난츄, うちなんちゅ)'라고 명확히 구분하여 자칭하고 있다.
또한, 1945년 오키나와 전투의 상흔으로 인해, 일본 일왕은 현재까지도 오키나와를 공식 방문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 본토 일부에서는 오키나와를 '남국(南国)'이라는 표현으로 이질적으로 지칭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화적·정서적 거리감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