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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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역사

여행에 빠질 수 없는게 바로 역사이다.

역사가 있으므로 문화 유적지가 되고 관광지가 되는 것이다.

아무런 역사가 없는 곳은 그냥 무의미할 뿐인 것이다.

홋카이도라는 이름이 생긴지 200년 채 되지 않은 이곳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어떻게 개발이 되었는지를 알고 가면 안 보이는 것도 더 보이게 되므로 10분 투자로 홋카이도 여행의 재미는 10배가 될 것이다.

아이누족의 탄생

기원전 1만 년 전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바다가 만들어지고 일본이 섬이 되면서 정착한 사람들이 만든 시대가 조몬 시대이다.

이 때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를 이용한 것처럼 토기를 이용한 시대를 일컬으며 섬에 고립되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는데 이를 조몬 문화라 한다.

해수면이 상승하기 전에는 내륙과 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도 한반도를 통해 간 부족도 있을 테고 지금의 러시아 쪽에서 내려온 부족이 있을텐데 그 때 북쪽에서 내려와 일본 동북지방과 현재의 홋카이도에 정착한 부족들이 있었다.

아이누 족
아이누 족

이들은 몸에 털이 많아 남자들은 구레나루와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여자들은 마치 배트맨의 조커처럼 입에 검은 문신을 새기는 관습이 있었다.

처음에는 털이 많아 털모(毛) 사람인(人) 한자를 써서 '毛人'이라고 쓰고 에미시(えみし)라고 읽었지만 턱수염을 새우로 비유해 새우 하(蝦), 오랑캐 이(夷)를 붙여 에조(蝦夷, えぞ)라고 부르고 그들이 사는 땅(地)을 가리켜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렀다.

일본 본토인들과 교역할 때 그들이 에조라고 부르는 것을 못마땅해 자신들의 언어로 '인간' 이라는 뜻을 가진 '아이누족' 이라고 불리길 원해 그 이후부터 아이누 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4세기 초 삼국시대, 한반도와 교역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의 최초 통일 국가인 야마토(大和) 정권이 관서(간사이)지방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도쿄의 동북지역과 현재의 홋카이도, 러시아와 분쟁 중인 쿠릴 열도, 러시아 사할린 섬의 일부에서 살던 아이누 족은 부족 생활을 하며 국가로 발전하지 못했다.

야마토 정권은 이후 다이카 개신,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를 거쳐 근대 국가로 발전하면서 국호도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바꾸며 근대 국가로 발전했지만 아이누 족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부족 생활만 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런 부족 생활을 하는 아이누 족을 오랑캐로 인식하고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일본의 쇼군과 아이누족과의 관계

헤이안 시대 말기에 관동 지방의 무사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는 집중 세력을 제압하고 가마쿠라 막부를 탄생시키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장군을 뜻하는 쇼군(将軍)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 으로 취임(1192년)했다.

정이대장군 한자를 보면 '칠 정(征)''오랑캐 이(夷)' 를 쓰는 것처럼 오랑캐를 정벌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오랑캐는 아이누 족을 말하며 이들을 견제하고 정벌하고자 정이대장군으로 취임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정이대장군이 임시로 부여된 관직이었지만 이 때부터의 정이대장군은 쇼군의 역할로 실제 일본 최고 권력을 가지게 되고 덴노는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겨져 있다가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일어나 메이지 유신이 단행될 때까지 약 700년간 권력이 유지되었다.

정이대장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큐슈 남부 지역에 있는 이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정서대장군(征西大将軍) 등을 두어 각각 견제를 했지만 추후 정이대장군만 남아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코샤마인 전쟁

아이누 족은 자체적으로 철을 생산하는 기술이 없어 제철 기술이 있는 일본인들과 교역을 했다.

어느 날 에조치(홋카이도) 남부, 지금의 하코다테 지역에서 아이누 족 소년이 작은 칼을 일본인 대장장이에게 주문했는데 형편없는 품질에 비싼 가격에 불만을 품고 싸움을 벌였다.

이에 대장장이가 그만 아이누 족 소년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이누 족은 조직적으로 단결해 일본인들과 전투를 벌였고 이 때 아이누 족의 지도자인 '코샤마인' 이름을 따 코샤마인 전쟁(1457)이라고 한다.

아이누 족은 일본인 거점 지역을 대부분 점령했지만 다케다 노부히로에 의해 코샤마인 부자가 살해되면서 전쟁은 종료되었다.

이후 다케다 노부히로는 이로 인해 가문의 이름을 가키자키(蠣崎)로 바꾸고 일본과 에조와의 창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마쓰마에 성

센고쿠 시대(전국시대 - 戦国時代)가 열리면서 오닌의 난(1464년)으로 약 100년 넘게 일본에서 혈투가 벌어졌고 이로 인해 많은 일본인들이 에조치로 넘어가면서 아이누 족들은 자신의 영토를 잃어가게 되었다.

가문의 이름을 바꾼 가키자키 5대 당주인 요시히로는 일본인들과 아이누 족의 중재자 역할을 하다 센고쿠 시대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종하고 또 다시 가문의 이름을 가키자키에서 마쓰마에(松前)로 바꿨다.

이렇게 이름을 또 바꾼 마쓰마에 요시히로는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대세로 떠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에조치 지도를 헌상함으로써 에조치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600년 세키가와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가 오고 1603년에는 에도 막부가 세워지고 1604년에는 아이누 교역의 독점권을 얻게 되며 마쓰마에 요시히로는 홋카이도 최초의 다이묘가 된다.

다이묘가 되기 위해서는 연간 1만석의 쌀을 수확을 해야 다이묘가 되는 자격이 되는데 당시 에조치는 쌀을 수확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 1석(石)은 성인 남성 1인이 1년간 먹는 쌀을 생산하는 만큼의 농지

하지만 아이누와의 독점 교역으로 수익을 낼 수 있어 다이묘 자리를 얻게 되었고 요시히로의 입장에서는 아이누와의 교역에서 상당한 수익을 내야만 했다.

마쓰마에 성

그 결과 일본인과 아이누의 거주지를 구분해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엄격히 통제하며 마쓰마에 성 아래에서만 교역을 할 수 있게 했다.

주로 일본인들은 철제품, 쌀, 자기 등을 거래하고 아이누 족은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수산물, 해초류와 동물 가죽들을 거래했다.

하지만 물품의 가격은 마쓰마에 번에 유리한 쪽으로 정하다 보니 아이누 족의 삶은 점점 악화되었다.

샤쿠샤인의 반란

아이누 족 삶이 계속 안 좋아지자 아이누 족 내부에서도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아이누 족은 부족생활을 지속했으며 히다카 아이누 족의 부수장인 '샤쿠샤인' 과 하에의 아이누 족의 수장인 '오니비시' 가 이끄는 두 부족이 어업과 수렵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648년에 샤쿠샤인이 오니비시의 부하를 살해하면서 두 부족 간 대립은 점점 심해졌다.

1653년에는 하에의 아이누 족이 히다카 아이누 족의 수장인 '가모쿠타인'을 살해 해 부족장으로 있던 샤쿠샤인이 히다카 아이누 족의 족장이 된다.

이를 계기로 마쓰마에 성에서 이 두 부족을 불러 중재를 시도했지만 자신의 부족의 족장을 살해한 샤쿠샤인이 오니비시를 또 살해했다.

이에 오니비시의 매형인 '우타후' 가 복수를 위해 마쓰마에 번청에 가서 무기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천연두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본인들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아이누 족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이를 계기로 샤쿠샤인이 아이누 족의 대표로 나서 아이누 족끼리의 싸움을 멈추고 다른 부족들에게 봉기를 호소했다.

1669년에는 2,000여명 정도의 군대를 모아 일본인 273명을 살해하며 점점 세력을 확장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마쓰마에 번은 에도 막부에 지원을 요청하여 병력을 보강받았다.

당시 일본군에는 센고쿠 시대부터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조총이 있었고 아이누 족은 주무기가 화살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하지만 아이누 족은 결사항전을 외치며 전투를 지속했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아이누 족과의 교역이 중단되고 독점 교역권을 잃을 우려가 생겨 마쓰마에 번은 아이누 족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샤쿠샤인도 전쟁이 더 오래 지속될 경우를 염려했는지 화해를 받아들여 마쓰마에 성으로 초대받아 잔치를 즐겼다.

그러나 이는 마쓰마에 번의 계략이었고 숨어 있는 일본군이 샤쿠샤인을 살해하고 다른 부족장들도 같은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이 후 지도자를 잃은 아이누 족은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쿠나시르 메나시 전투

일본인들이 에조치를 점차 점령함에 따라 아이누 족은 오히려 자신들의 어장이었던 곳에서 반대로 고용되어 혹독한 노동에 처해졌다.

이에 참지 못한 아이누 족은 1789년에 다시 봉기를 일으켰지만 조직적인 전투 경험이 없어 쉽게 제압되었다.

이에 관련된 자들을 마쓰마에 성에서 71명 처형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에도 막부는 에조치 주민들을 본격적으로 이주시키게 되었다.

일본 최초의 개항

1853년, 미군이 에도 막부에게 4척의 군함을 데리고와 개항을 요구하는 쿠로후네 사건이 발생하였고 에도 막부는 미군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쿠로후네 사건
쿠로후네(黒船-くろふね)는 검은배라는 뜻의 일본어

이후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을 통해 하코다테와 시모다를 개항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일본은 미국과의 불평등한 조약을 맺게 되었다.

하코다테와 함께 개항하는 항구로는 나가사키, 고베, 니가타, 요코하마가 있었다.

미군에 대항하지 못하고 개항을 하는 에도 막부의 무력함을 본 사쓰마번과 죠슈번은 막부를 타도하고 덴노의 정권을 회복하자는 존왕양이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1867년 대정봉환으로 쇼군의 통치권이 덴노에게 반환되었지만 700년에 걸친 막부 체제가 즉각적으로 붕괴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통치권은 덴노에게 넘어갔지만 나머지 행정력과 다른 권한은 아직까지도 도쿠가와 가문의 영향력이 컸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도 쇼군의 관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신전쟁

이에 불만을 품은 사쓰마, 죠슈번 외 2개의 신정부군은 번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교토를 장악해 덴노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1868년 1월에 메이지 덴노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관작과 영지를 반납하라는 '왕정복고 대호령'을 발표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에 응하지 않고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개항을 쉽게 해준 덕분에 당시 미국은 도쿠가와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을 끌기만 해도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시간을 끌었다.

초조함을 느낀 신정부군은 낭인 사무라이를 에도에 보내 방화, 살인 등을 일으켜 치안을 불안하게 만들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게 되었고 이렇게 막부의 마지막 전쟁인 보신전쟁이 시작되었다.

오사카 성에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5,000여명의 병력과 함께 5,000여명의 사쓰마번 연합군이 점령하고 있는 교토로 자신만만하게 진격했지만, 최신 무기를 가진 신정부군은 인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요시노부 군을 내쫓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역적으로 공식 선언하자 요시노부는 오사카 성에 남은 병력들에게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하고 최측근들만 데리고 에도 막부로 도망갔다.

이 소식을 듣자 다른 지방의 번들도 신정부군을 지지하게 되었다.

에도 무혈개성

오사카에서 에도 막부까지 도망간 요시노부는 일본 최고 권력자로서 역적으로 취급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버틸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더 이상의 내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에 에도 막부 해군 총재였던 카츠 카이슈는 신정부 연합군의 총 대장인 사쓰마 번의 사이와 다카모리와 협상하여 항복했고 신정부군은 에도성을 무혈로 점령하게 되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와 동북 지역에는 막부 지지자가 있었으나 너무 쉽게 항복한 탓에 이에 불만을 품은 막부군 일부는 우쓰노미야 성과 우에노에서 저항했으나 최신식 무기를 가진 신정부군에게는 차례대로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끝까지 신정부군에 저항하며 막부 세력을 지지한 동북 지역의 번들은 아이즈 번과 쇼나이번을 중심으로 센다이 번 등으로 오우에쓰 열번 동맹이 결성되었다.

에도 무혈개성을 반대한 에도 막부 해군 부총재인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오우에쓰 열번동맹에는 합류하지 않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의(義)를 지키며 대한 신정부 군의 취급이 부당할 경우 즉시 무력으로 대항하겠다는 의지로 에도만에 정박해 있었다.

신정부는 요시노부를 슨푸 번(현재의 시즈오카)의 다이묘로 임명되고 요시노부의 안전이 보장되자 신정부에 협력한 에조치의 마쓰마에 번을 접수하고 에조치를 개척해 새로운 독립 정권을 세운다는 계획으로 남아 있는 병력을 데리고 당시 최대의 서양식 전투함대를 끌고 에조치로 향한다.

가는 도중 센다이에 들려 에도 막부를 지지하는 3,000여명의 병력을 추가로 데리고 에조치로 북상한다.

에도공화국 수립

당시 마쓰마에 번 번주는 마쓰마에 노리히로였는데 에노모토 부대의 공격을 피해 마쓰마에 성에서 다테 성 그리고 지금의 아이모리 현의 쓰가루까지 도망을 쳤지만 폐결핵이 악화되어 25세 나이로 사망하면서 마쓰마에 성을 비롯한 에조치를 다케아키 부대에게 넘겨주고만다.

이에 에노모토는 하코다테를 중심으로 한 '에조 공화국' 이라는 독립 정권을 수립한다.

하지만 에노모토의 주 함대가 악천후로 좌초되는 일이 벌어지고 중립을 지키던 서양 세력도 신정부를 일본 전체의 정부로 인정하고 미국은 에도 막부에 팔려고 했던 철갑함 '코테츠' 를 신정부에 넘겨주면서 해상 전력차이는 더 크게 벌어지게 된다.

신정부군의 함대가 미야코만에 정박하며 추가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때 위기감을 느낀 에노모토는 지원 병력이 오기 전 철갑함인 코테츠를 선제 공격하기로 마음 먹고 세 척의 함대를 보내지만 엔진 고장 등의 이유로 겨우 한 척만 코테츠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신무기를 장착하고 있던 신정부군을 이기지 못해 에노모토 군이 패배하고 만다.

에노모토 군은 겨우 하코다테로 도망을 가지만 신정부 군의 에조치 상륙을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1869년 봄 신정부의 1만 병력은 하코다테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코다테에 주둔하고 있는 에노모토와 그의 3천명의 병력들은 숫자적인 압도에도 끝까지 저항하지만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고료카쿠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하코다테 고료카쿠
하코다테 고료카쿠도 별모양을 하고 있다.

보신전쟁의 끝

신정부군의 참모 구로다 기요타카는 에노모토에게 항복을 권하지만 에노모토는 끝까지 싸울 생각으로 이에 응하지 않고 자신이 국제법과 외교에 관해 번역한 '만국해율전서' 라는 책이 전쟁으로 인해 없어지는 게 아깝다는 생각에 책을 구로다에게 보내 소중히 간직해달라고 전한다.

이 책을 본 구로다는 에노모토는 신정부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여겨 책의 답례로 술과 참치를 고료카쿠에 보내고, 에노모토는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휴전을 부탁했다.

이에 구로다는 휴전을 응하고 그 이후 총 공격 일시를 통보했다.

휴전하는 동안 에노모토와 에조 공화국 지도자들은 항복을 합의함으로써 일본 마지막 내전인 보신전쟁이 끝이 난다.

일본에 다테 시(市)가 두 개인 이유

보신 전쟁에서 패하고 센다이 번의 다테 쿠니시게(伊達邦成)는 24만석 영토를 거의 몰수당하고 단 58석의 영지만 남아 살아 남기 위해 홋카이도 이주를 신정부에 요청한다.

이에 신정부는 아무런 보상없이 단지 사무라이 신분 유지만의 조건으로 허가하며 쿠니시게와 그의 가신 및 가족 2,800명의 인원은 약 12년에 걸쳐 홋카이도로 이주하게 된다.

홋카이도 개척의 공을 인정 받아 메이지 정보는 다테 쿠니시게에게 남작의 작위를 하사하며 몬베츠로 불리던 개척지 지명을 다테무라(伊達村)로 변경한다.

이들은 홋카이도에서 살면서 농업을 처음 시도하였고 미국에서 농기계를 도입해 일본에서 서양식 농업도 일본 최초로 시도하며 농업 현대화를 위해 기반을 다진다.

이후 홋카이도의 다테무라는 다시 다테시(伊達市)로 이름이 바뀐다. (1972)

하지만 현재 후쿠시마현에도 동일한 이름의 다테시가 있으며 센다이번에서 살던 후손인들이 다테군의 다테 정, 야나가와 정 등이 통합되면서 홋카이도 다테시의 허락을 받아 2006년 후쿠시마 타테시로 탄생되어 한자까지 동일한 도시 이름을 갖게 된다.

  • 다테 쿠니시게는 다테 마사무네의 가신 중 맹장으로 평가 받던 다테 시게자네의 가문인 와타리 다테(亘理伊達) 가문의 14대 당주이며, 다테 마사무네는 센고쿠 시대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에 보면 초승달 장식의 투구를 쓴 애꾸눈의 장수가 바로 마사무네이다.
  • 세키가와라 전투 이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거성 이전을 허락받아 센다이에 성을 쌓고 점령하였고 이로 인해 센다이번은 흔히 다테(伊達) 가문의 번이라고 한다.
  • 다테 마사무네는 임진왜란에도 참여했었다.
다테 마사무네
애꾸눈의 다테 마사무네
  • 홋카이도 다테시와 후쿠시마 다테시는 자매결연을 맺지는 않아 다소 아이러니하며, 일본에는 다테시 이 외에도 동일한 이름을 가진 후추시(府中市)가 있다.

홋카이도 개척사

하마터면 일본이 2개의 국가로 될 뻔한 위기감을 느껴서 그런지 메이지 정부는 에조치를 홋카이도로 이름을 바꾸고(1869)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홋카이도 이주 정책을 펼친다.

또, 홋카이도에서 가장 평평한 지형인 '이시카리 평야' 인 삿포로에 개척사를 설치하고 추후 일본 제 2대 총리를 맡게 되는 '구로다 기요타카'를 개척사 차관으로 임명했다.

  • 1869년은 홋카이도에서 중요한 연도이며, 이 때부터 홋카이도가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로다는 러시아 남진 정책에 자극받아 어떻게든 홋카이도를 개척하려는 의지가 강했으며 러시아 견제 세력이며 개척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미국은 미국 농무국 국장과 지질 광산학자들을 홋카이도에서 3년 정도 머물며 삿포로의 도시 계획을 주도해 그들의 영향으로 삿포로 시가 네모 반듯한 모양의 블록들로 도시가 형성되었고 기존 벼 농사 위주의 농업보다는 가축과 기계를 이용한 밭농사와 축산업이 더 적합하다고 제안한다.

구로다는 이를 받아들이고 이주자들에게 축산업을 가르치기 위해 각 분야별 지도자들을 미국에서 초빙한다.

그 중에 한 명이 삿포로 농학교(현, 홋카이도 대학) 초대 교장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이다.

그는 8개월간의 교장 재임 후 미국으로 돌아갈 때 명언을 남긴다.

1876년 개척사는 '개척사 맥주 양조소' 를 만들어 스스로 맥주에 적합한 품종을 개발하며 세계 각자에서 맥주 효모를 수집하는 등 맥주 개발에 힘을 쓴다.

1877년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인 삿포로 라거를 출시하며 이 맥주가 바로 삿포로 맥주이다.

개척사의 축산업 발전으로 홋카이도는 현재 일본의 식량창고 역할을 하게 되며, 일본의 소고기 20%, 우유 50%, 감자: 80%, 콩: 90% 생산량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누 족의 현재

개척사 설립과 이주 정책을 펼친 메이지 정부는 1899년 동화정책 명목으로 '구토인 보호법' 이라는 법을 제정한다.

보호법이라 쓰고 차별법이라 읽는 이 법은 일제가 우리한테 한 것처럼 토지를 빼앗고 아이누 고유 언어를 못 쓰게 하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해야하고 아이누 풍습도 금지를 시킨다.

몇 세기 동안 수렵 생활을 하고 살던 아이누 족들은 수렵도 금지당하고 받은 토지도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필요없는 땅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되팔아 버리게 된다.

이렇게 아이누 족은 점점 몰락하며 일본인들의 강제징병, 강제노동, 인체 연구 등에 투입되고 여성들은 일본인들의 첩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옛구(舊) 흙 토(土)로 쓴 구토인의 글자의 뜻은 원래 살던 사람의 뜻으로 일본 본토에 사는 일본인과 구분지어 부르게 된다.

이로써 자연스럽게 차별이 발생되었고 당시 일본인 인류학자는 아이누 족을 '인간의 덜 진화된 모습' 이라 간주하게 되며 한 때 일본 교과서에서는 '홋카이도에는 사람이 없고 곰과 아이누만 살았다' 라고 나왔다.

그렇게 아이누 족들은 어릴 적부터 차별을 당하며 자랐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결혼과 취업에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이후 1994년에는 아이누 족 최초의 일본 국회의원이 된 가야노 시게루가 아이누어 사전을 만들고 아이누 족의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며 1997년에는 구토인 보호법을 폐지하고 아이누 문화를 진흥하기 위한 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아이누 족을 '민족' 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2019년에는 아이누 족에게 단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갑자기 '원주민' 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는 일본 정부보다 한 발 빠르게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쿠릴 제도를 방문하여 '아이누 족을 러시아의 원주민으로 인정한다' 라고 선언하여 러시아와의 쿠릴 제도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급하게 인정하게 된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재 아이누 족은 1만 3천명 정도 남았고 아이누어를 사용하는 이는 단 2명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아이누 문화 보호를 위해 아이누 민족 박물관이 세워지고 아이누의 후손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